[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2부 무오사화) – 32회 이목의 집을 수색하여 찾아낸 임희재의 편지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4일에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찾아 올 적에는 아울러서 그 집의 문서까지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4번째 기사)

이러자 의금부는 이목(1471∼1498)의 집을 수색하여 임희재(1472~1504)가 이목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다. 이목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설치된 실록청에 근무하면서 성중엄에게 김일손의 사초를 실록에서 누락해서는 안 된다고 엄중 경고한 선비로, 1492년(성종 23년) 12월에 영의정 윤필상(1427∼1504)을 간귀(奸鬼)로 규탄하고 1495년 1월에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연산군이 수륙재를 올리는 것을 반대하고 노사신을 국왕을 우롱하는 대신으로 비판하였다가 1495년 1월27일에 공주로 귀양 갔다.

청도 자계서원 (김일손을 모신 서원)


임희재 역시 1495년 1월에 이목과 같이 성균관에서 공부한 동문이었다.

그는 조선 왕조의 3대 간신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임사홍(1445∼1506)의 둘째 아들로서 그 역시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이목 등과 함께 수륙재를 반대했다가 과거 응시를 정지당했다.

당시에 연산군은 정희량을 해주로, 이목을 공주로, 이자화를 금산으로 나누어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 임희재 등 21인의 과거응시를 정지시켰다.(연산군일기 1495년1월27일 3번째 기사)

이로부터 4개월이 지난 5월22일에 이목은 유배가 풀리고 정거(停擧 과거시험 정지)로 감형되었고, 임희재는 정거가 풀려 과거 응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5월22일 2번째 기사)

그러면 임희재가 이목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4일 5번째 기사)

“저는 우생(友生)이 없어 빈집에 홀로 누워 세상의 허다한 일만 보고 있습니다. 들으니, 그대가 장돈(章惇 이극돈을 말함)의 아들 장전(章銓 이세전을 말함)을 잘못 거슬려서 성내게 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지금 물론(物論 여러 사람의 논의나 세상의 평판)이 심히 극성스러워 착한 사람이 모두 가버리니, 누가 능히 그대를 구원하겠는가? 부디 시(詩)를 짓지 말고 또 사람을 방문하지 마오. 지금 세상에 성명을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근일(近日)에 정석견이 동지성균(同知成均)에서 파직되었고, 강혼은 사직장을 올려 하동의 원님이 되었고, 강백진은 사직장을 올려 의령의 원님이 되었고,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으니, 그밖에도 많지만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철견·윤탄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는데, 논간(論諫)을 해도 임금이 듣지 않으니, 어찌 하겠소.

요사이 종루(鐘樓)에 이극돈의 탐취(貪聚)한 사실을 방(榜)을 써서 붙였으니, 저도 또한 수경(數頃)의 전토를 충주·여주의 지경이나 혹 금양(衿陽)의 강상(江上)에 얻어 수십 년 남은 생애를 보내고 다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을까 하니, 그대도 다시 올라올 생각을 하지 말고 공주(公州)의 한 백성이 되어 국가를 정세(丁稅)로써 돕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임희재가 이 편지를 쓴 시기이다. 임희재는 이목이 공주에 있을 때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마지막에 ‘다시 올라 올 생각을 하지 말고 공주의 한 백성이 되라고 적혀 있다.

사진 2 담 너머에서 본 자계서원

그러면 성균관 유생 이목이 공주에 있던 때는 언제인가? 그는 1495년 1월27일에 공주로 유배 가서 5월22일에 유배가 풀렸으니 4개월 정도 공주에 있었다. 따라서 임희재가 편지를 쓴 시기는 바로 이 시기(1495년 1월27일부터 5월22일사이)의 어느 날이다. 1)

또한 “이철견·윤탄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는데, 논간(論諫)을 해도 임금이 듣지 않으니, 어찌 하겠소”란 편지 구절은 1495년 2월11일에 연산군이 이철견을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로, 윤탄을 동지의금부사로 임명하여 발생한 사안이었다.

대간들은 이철견이 정호의 첩 종을 빼앗아 간음하여 파직 당했고, 윤탄은 충청감사였을 때 무능했고 기생과 간통했으며 환속한 의초라는 승려와 부정한 금전관계를 맺어 임명을 철회하도록 탄핵했다.(연산군일기 1495년 2월12일 1번째 기사)

그러나 연산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간들은 몇 달 간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했으나 연산군의 뜻을 굽히지 못했는데 논란이 마무리 된 시기는 1495년 5월28일이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2월13일, 3월1일, 4월28일, 5월1일, 2일, 13일, 5월28일) 2)

요컨대 임희재는 1495년 1월27일부터 5월22일 사이에 공주에 유배중인 이목에게 편지를 썼다.

1) 한편 임희재 편지에 적힌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인 권오복’이 고을 수령에 제수된 때가 1495년 6월29일이었다.

2) 연산군이 뜻을 굽히지 않은 데는 이들이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이철견은 세조 비 정희왕후의 조카(이철견의 어머니가 정희왕후의 여동생)였고, 윤탄은 성종비 정현왕후의 숙부(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의 동생)였다.

김세곤 칼럼니스트  segon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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