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2부 무오사화) – 29회 사간 이의무·헌납 김일손 등, 국정쇄신안을 건의하다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연산군 1년) 9월15일에 대간들은 노사신을 영의정에서 체직시키고 부원군으로 내려 앉히는 1차적 목표를 달성했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대간들은 노사신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탄핵을 계속했다.

9월16일에 사간원 정언 한훈은 노사신을 경연에 참가하지 말도록 아뢰었다. 9월26일에 사간원은 대간의 간언을 들을 것과 노사신 등의 죄를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9월28일과 10월1일에도 한훈은 거듭 노사신이 경연에 참여하지 말도록 거듭 아뢰었다.

결국 노사신은 11월1일에 원상에서 해면을 요청했고 연산군은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11월 1일 3번째 기사)

한편 10월30일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변고가 일어나자 연산군은 11월1일에 국정 쇄신 방안을 제시하라고 신하들에게 하교했다.

11월18일에 사간 이의무 등이 기강을 펴는 일, 여알을 금할 것, 토색질을 금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11월 18일 1번 째 기사)

사간 이의무 등(당시 사간원 사간은 이의무, 헌납은 김일손, 정언은 한훈과 이주였다.1)은 10월은 순음(純陰)의 달인데 양기가 의당 잠복하여야 할 것인데, 천둥과 번개가 서로 부딪치니 큰 변이라고 전제하면서, 연산군에게 경연(經筵)에 나갈 것을 건의하고, 10가지 현안을 자세히 아뢰었다.

그것은 1. 상하의 화목 2 기강의 진작 3, 외척의 배제 4. 여알(女謁 : 궁중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를 어지럽히는 여인)의 배척 5. 권신의 억압 6. 토색의 금지 7. 상벌의 공평 8. 유일(遺逸:초야에 숨어 있는 인재)의 등용 2) 9. 옥사의 신중한 처리 10. 징세의 관용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항은 ‘권신의 억압’이었다. 이의무 · 김일손 등은 권신으로 우찬성 이극돈과 병조판서 성준을 지목했다. 이극돈·성준은 교대로 이조판서가 되어서 사소한 원한 때문에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 조짐을 막지 않으면 장차는 ‘우이의 화[牛李之禍]’3)를 이루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사(邪)와 정을 통찰하시어, 권신이 서로 공격하는 폐단을 막으라고 아뢰었다.

이러자 11월20일에 우찬성 이극돈 · 병조 판서 성준이 즉각 사직을 청했다. 이 날 영의정 신승선도 도의적 책임에서 사직서를 올렸다. 하지만

연산군은 들어주지 않았다.

11월25일에도 이극돈이 사직을 청했으나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 때의 사태는 일단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사진=연산군 묘 입구

사진=연산군 묘 상설도

사진=연산군 묘

그런데 연산군 2년(1496년)에 정승의 임명과 관련된 문제가 불거졌다.

1496년 2월4일에 연산군은 정문형을 우의정에 임명했는데 2월5일에 대간들은 그가 재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하였다.

연산군은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윤필상 · 신승선등 주요 대신들은 정문형의 우의정 임명에 찬성했다. 연산군은 대신들에게 의견을 들었는데 모두 현저한 허물이 없다고 말했다면서 대간을 압박했다.

그러나 대간의 간쟁은 두 달 넘게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정문형은 두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다. (1495년 2월22일)

결국 연산군은 1496년 윤3월4일에 정문형의 우의정 임명을 철회하고 한직인 영중추부사로 발령 냈다. 대간의 반대로 연산군이 정승 임명을 철회한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연산군 재위 3년(1497년) 1월16일에 천둥과 번개가 또 쳤다. 삼사는 그 원인으로 국왕의 오랜 경연 불참과 삼정승이 직무를 소홀히 한 것을 들었다. 그러자 영의정 신승선 · 좌의정 어세겸 · 우의정 한치형과 도승지 강구손이 사직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7년 1월22일)

이 때 연산군의 전교는 의미심장하다.

“대간은 옛 글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지금 이 뇌성의 변은 다른 사람들은 재변이라고 하지만 나는 재변은 아니라고 본다. 만일 재변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내가 부덕(不德)하기 때문이지 어찌 경 등 때문이겠는가. 최근 감기 때문에, 또 큰일이 있기 때문에 경연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 경연을 폐지한 관계로 재변이 일어났겠는가. 삼공이 만일 용렬하고 탐학하다면 재변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경등은 모두 덕망이 있으니 그만두지 말라.”

1) 1495년 11월25일에 사간 이의무·헌납 김일손·정언 한훈과 이주는 수륙재를 금할 것을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11월 25일 3번째 기사)

2) 이의무 · 김일손 등의 ‘유일(遺逸)천거’에는 김굉필 · 정철견이 언급되어 있다.

“유일(遺逸)을 천거하여 어질고 슬기로운 이들을 등용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 선왕이 일찍이 유일을 구하니,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이 생원(生員) 김굉필·정철견을 천거하였는데, 김굉필은 겨우 참봉에 등용되고 정철견은 아직도 초야에 있으니, 이는 유일을 구한 본의가 아닙니다.”

3) 우·이의 화[牛李之禍] : 우·이는 중국 당(唐)나라 때의 우승유와 이종민 및 이덕유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들은 요직에 있으면서 각기 자기의 당파를 수립하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서로 공격 배제를 일삼아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김세곤 칼럼니스트  segon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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